주일 설교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까요? (렘 32:1-15)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 외에는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인간은 세상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얽매여 종처럼 살아갑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본문에는 많은 것을 가졌지만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두 사람과 가진 것 없고, 갇힌바 된 사람이지만 갇히지 않고 다 누리고 있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레미야와 같이 세상속에 갇힌바 된 것 같지만 순종함과 소망으로 풍성한 인생을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냄 받은 사명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 가지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부름 받은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보냄 받은 의식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죄의 자리에서 구원의 자리로, 멸망의 자리에서 섬김의 자리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자리에 머물러 두지 않으시고, 사명의 현장에 보내십니다. 예레미야는 오해 받고, 매 맞고, 갇혀도 보냄 받은 자의 사명으로 살아갑니다. 본문에서 선지자는 시위대 뜰에 갇힙니다(2절). 그 이유는 시드기야왕의 말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3-5절). 시드기야는 왕의 권력에 매여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행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곳에 있는 이유가 사명과 소명이었기에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대로 예언하는 삶을 살아갑니다(행4:19; 5:29참고).
계산적인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유다에 멸망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1절, 왕하25:3-4참고). 전쟁이 나면 사람들은 재산을 잃고 노예가 되어 끌려갈 것입니다. 그때 예레미야의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 찾아와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라 합니다. 나라가 망하고 땅을 잃게 될 때에 땅을 사는 것은 무모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멜의 청을 받아들여 아나돗에 있는 밭을 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① 말씀을 순종함에 물질적 계산을 포기했습니다. 8절 하반부 말씀처럼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문 6절 말씀과 14-15절 말씀을 보면 예레미야는 철저히 하나님 말씀을 앞세우며 살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예레미야는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판단과 선택의 기준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두었습니다.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거나 시류에 편승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실까?” 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길 때 삶의 자리에서 사명과 소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길 때 그 말씀이 나를 환난과 위기에서 지켜 줍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지만 말씀을 소중히 여겨 최선을 다해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② 말씀이 주는 소망을 붙들고 세상적 계산을 버렸습니다. 예레미야가 밭을 산 것은 누가 봐도 어리석은 행위였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고 웃음거리가 될 행동이지만 그는 말씀이 주는 희망을 붙들고 있습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면 예레미야는 자기 나라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겠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그 땅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돈을 주고 내일의 희망을 산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아무리 절망적인 환경이라도 절망하지 말고, 힘써 내일의 희망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어려운 난관을 맞이하면 "이제 다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만 죽지 않으면 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순간에도 꿈과 믿음을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복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믿음만은 사야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살만 합니다. 과거의 어려웠던 기억, 실패했던 기억 때문에 하나멜처럼 "역시 현찰이 최고야!" 하고 살면 안 됩니다. 말씀이 주는 소망의 믿음이 최고인 줄 알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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