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내 평생의 소원 (단 6:10-23)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누구에게나 고통이 있고 고통이 동일한 것이지만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악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고 모독하지만, 선한 사람은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 궁극에 가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어떤 고난을 당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자세로 고난을 받아들이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고 의미도 달라진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자세로 이 땅의 고난들을 직면해야 할까요? 본문을 통하여 언제, 어디서나 변할 수 없는 우리의 자세를 평생의 소원으로 생각하며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은 평생에 기도의 소원을 가지고 실천하였습니다. 다니엘시대 바벨론은 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세계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때부터, 지금 다리오왕 때까지 약 60여년을 높은 관직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맛을 보았습니다. 남을 지배하며 사는 재미를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시기, 질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기도를 겨냥한 기도금지법이 시행됩니다(6:7절).
다니엘은 이 조서에 어인이 찍혀 그 법이 실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 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에서 돋보이는 구절이 있습니다.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라는 말씀과 “전에 행하던 대로”라는 말씀입니다(10, 11절). 그리고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기 전과 넣은 후에 하는 말 속에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란 말씀(16, 20절)은 다니엘의 기도가 항상 여전하게 이루어진 것을 보여주는 말씀들입니다. 그의 기도는 거역할 수 없는 왕의 명령임을 알고도 자기 평생의 소원인 기도를 굽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자굴에 던져 넣는 다는 것이 무엇임을 잘 알면서도 소박한 기도의 시간과 장소를 굽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있는 가장 중요한 갈망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였습니다(10절). 기도를 체질화 할 수 있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기도를 평생의 소원처럼 잘 감당하여 주님의 승리를 맛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의 평생 소원은 감사였습니다. 다니엘은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것, 누릴 수 있는 것, 해볼 수 있는 것을 다 가진, 세상 재미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명이 죽을 수도 있는 이 순교의 상황에서도 버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소원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였습니다. 다니엘이 그 환경을 이해 못하는 바보는 아닙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에게 원망할 수 있는 조건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음으로 정직하게 충성했는데, 어떤 흠도 보이지 않고 살아왔는데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고 항변하며 원망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이게 뭡니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어인이 찍힌 줄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진심어린 감사로 나아갑니다. 감사와 염려, 기쁨과 원망은 무엇을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 무엇을 생각하느냐? 에 따라서 즉 마음에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런데 감사와 원망의 결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기도와 감사는 함께 체질화, 성품화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너무 감사를 모르고 기도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다니엘의 기도와 감사는 일상적인 삶에서 실천하는 순교자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일상에서 순교는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험악하고 분주한 세상에서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은 철저한 자아의 죽음 없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감사를 내 평생의 유일한 소원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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